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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 P. 244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아리안의 영광과 아우슈비츠를 생각한다.

잔디만 남기고 잔디 외의 풀은 사그리 뽑으며

남아연방을 생각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생각한다.

그리고 운디드니의 인디언을 생각한다.

순화교육시간에 인내훈련 대신 잡초를 뽑는다.

잡초가 무슨 나쁜 역할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잔디만 남기고 잡초를 뽑는다.

도시에서 자라 아는 풀이름 몇 개 안되는 나는

이름도 모르는 풀을 뽑는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잡초가 된 풀을 뽑는다.

아무도 심어준 사람 없는 잡초를 뽑으며,

벌써 씨앗까지 예비한 9월의 풀을 뽑으며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잘 알고 있던 것 같은 것들이 갑자기 뜻을 잃는다.

구령에 따른 동작처럼 생각 없이 풀을 뽑는다.

썩어서 잔디의 거름이 될 풀을 뽑는다.

뽑은 잡초를 손에 쥐고

남아서 훈련받는 순화교육생을 바라본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원산폭격, 한강철교의 순화교육생을 바라본다.

뽑혀서 더미를 이룬 잡초 위에 뽑은 잡초를 보태며

15척 주벽(周壁)을 바라본다. 주벽 바깥의 청산(靑山)을 바라본다.
- P.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