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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Review

문익환 평전

 

 

처음 문익환 목사란 이름을 들은 때는 어릴 때 뉴스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했었는데 그 때문에 체포되는 모습이 뉴스화면에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땐 어렸기도 했었고 북한에 가는것이 잘못된 것인데 그들은 왜 갔을까? 하는 인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간간히 책에서 이름은 보았지만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언젠가 친구가 문익환 목사 이야기를 하면서 물어보았다. 아느냐고? 또 어떤 방송에서 우리들은 문익환 목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왜지?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너무 문익환이란 인물에 대해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60대가 될 때까지 목사로 활동하면서 시대상황과 문제들에 대해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교회안에서 재야 운동가들의 뒤에 있었다. 허나 장준하의 죽음을 보고는 이제까지의 성격과는 정반대의 민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는 1976년 3·1민주구국선언문을 주도하여 작성하고 발표한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구속되고 이 첫 구속을 시작으로 그가 죽는 1994년까지 총 6번의 교도소 생활을 하게된다.

재야의 대통령으로 민통련 의장으로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다. 70년대의 운동세력과 80년대의 운동세력 사이의 갈등에서도 그는 그 간격을 좁히고 갈등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분신정국 상황에서 분신만은 하지말도록 설득하고 다녔다.

민족주의자로서 그는 통일에 대해서도 노력해 북한을 방문해서는 김일성과의 만남을 가지고 서로의 통일에 대한 의견과 과제등을 의논하고 돌아왔다. 그는 통일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했다. 김일성과의 만남에서 5년 이내에 통일을 이룩하자고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지만 그는 구속되고 그가 이룩한 북한과의 통일에 대한 의견, 문제들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문익환 목사 인생의 77년 중 재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전면에 나서서 활동한 시기는 17년. 이 중 11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하지만 6년이라는 시기동안 그의 행동으로 그는 민중들의 가슴 속 깊이 남아있다.

 

"저는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 믿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문익환 목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한 교회에서 예배를 보면서 한 말이다. 이 말 한마디로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통일에 대한 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생운동이 사라진 이 시대.

시대는 변했지만 여전히 민주주의, 노동운동, 사회여러분야의 문제들, 통일에 대한 문제들은 남아있다.

문익환, 리영희 같은 인물이 다시금 나와주었으면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