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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中 법정풍경 #1

 

 

그 일은 아무래도 현장 풍경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이다. 당시에는 마침 문성근이 연극을 하던 때였는데, 그가 채록한 그 진귀한 법정 풍경은 마치 한 편의 희곡작품을 연상시킨다.

 

장소 : 서울지방법원 대법정

일시 : 1986. 10. 7. 화. 오전 10시.

 

(오전 10시 개정에 맞추기 위해 급히 공판정을 향해 가다가 마침 9시 45분경 흰색 봉고차에 호송되어 오는 문익환 목사를 만났다. 푸른 수의를 입고 6명의 교도관이 앞뒤 좌우에 앉았다. 주먹을 쳐들어 보였으나 수갑을 찬 탓인지 조금 손을 들어 반길 뿐이다. 그러나 표정은 매우 밝다. 많은 정사복 경찰이 공판정 입구를 막고 2차, 3차 계속 가방 검사를 한다. 앞에 누군지 50대 여인은 녹음기를 뺐겼다. 많은 분들이 보인다. 고은, 이우정, 공덕귀, 김종완, 김승훈, 이해찬, 박용수, 유원규, 장을병, 박종태, 박찬종……. 10시 조금 못 미처 이돈명, 한승헌, 김명윤, 신기하 등이 입장한다. 10시 정각에 검사 3명이 보따리를 들고 들어온다. 푸니 두께 20센티미터 가량의 서류이다. 또 판사 3명이 들어온다. 정리가 "일어서!" 외치는데 웅성웅성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그냥 앉아 있는 사람도 있다.)

 

판사 : 문익환 피고 입정시키시오.

(교도관 3명이 오른쪽 문을 통해 호송한다. 문 목사가 입정하자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 모두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일어나 박수로 맞이한다. 여기저기서 "목사님!", "의장님!" 외치며 인사말을 건넨다. 문 목사는 오른손을 들고 웃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눈으로 인사한다. 문 목사가 착석한 후 판사는 잠시 무표정하게 방청석을 보다가)

판사 : 법정에서는 조용해야 합니다. 소란스러우면 공정한 재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방청석 뒤쪽에서 "안 들려요! 좀 크게 얘기 하세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앞에 있는 마이크를 잡아당겨 말하면 될 것을 그대로 계속한다.)

판사 : 이름이 문익환 맞습니까?

문 목사 : (잘 안 들리는지 몸을 앞으로 굽히며) 네.

판사 : 주민등록번호 욉니까?

문 목사 : 주민등록증이 없습니다.

판사 : 생년월일은?

문 목사 : 1918년 6월 1일.

판사 : 직업은요?

문 목사 : 목사입니다.

판사 : 주소는?

문 목사 : 중구 신당동 377-23 (23에서 머뭇거리다가) 맞지요?

판사 : (조금 웃으며)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문 목사 : 맞습니다.

판사 : 공소장을 받아 보았습니까?

문 목사 : 네.

판사 : (검사측을 보며) 기소요지 낭독하십시오.

문 목사 : (손을 들어올려 앉으라는 시늉을 하며) 검사는 앉으세요. (판사에게) 인정신문이 끝나면 저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거나 하는 저의 권한을 얘기해주는 절차가 있지 않습니까? (변호사를 보며) 어때요? 그런 것 아닙니까?

판사 : 잠시 기다리세요. 기소요지 낭독한 다음에 얘기하는 겁니다. (검사가 일어나 낭독 준비를 하자)

변호사 : (일어서며) 피고인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공소장이 피고에게 전달되었으니 내용은 알고 있고 또 피고가 원하지 않으니 낭독 절차는 생략합시다.

문 목사 : 인정신문도 받지 않고 얘기하려다가 그건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재판받으려고 나온 것이 아니고 저에게 국가보안법을 추가적용해달라고 나온 것입니다. 검찰은…….

판사 : (문 목사의 발언을 제지하며) 그러면 기소요지를 낭독한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까?

변호사 · 문 목사 : 네.

판사 : 좋습니다. (문 목사에게) 피고는 개개의 질문에 답변을 거부할 수 있고 피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진술을 하십시오.

문 목사 : (일어서며) 이것은 너무 중요한 이야기라 서서 하고, 나중 국가보안법 문제 등은 앉아서 하겠습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차분한 목소리로) 제 생애에 최대의 충격은 지난 5월 20일 서울대학 강연에서 젋은 학도가 국가를 위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 떨어져 죽는 엄숙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죽어 무덤에 가더라도 제 망막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불덩어리가 보입니다. 그의 숭고한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에게 명복을 빔과 동시에 그의 죽음에 값하는 인생을 살아가겟다는 그러한 심정입니다. 그의 죽음에 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옷깃을 여미고 이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그 일이 그토록 가슴이 아픈 것은 저기 뒤에 아흔이 넘으신 저의 어머님이 앉아 계신데, 제가 그날 서울대에 강연을 간다고 말씀드리니 '이 얘기는 꼭 해라. 제 몸에 불을 지르고 죽는 일은 제발 중단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소리에 조금 울음이 섞여나온다. 자제하려 애쓴다.) 제 어머님은 분신한 사람들 이름 모두를 적어 가슴속에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방청석 맨 앞줄에 앉은 문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은 '헉!' 하고 갑자기 작은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옆에 앉은 손녀가 할머니 손을 잡으며 진정시킨다.) '일제시대에 만주에 있던 독립군 중에서 자살한 사람은 없다. 절대로 죽지 말라. 간곡히 부탁해라', 그 얘기를 먼저 하려 했는데 못 했습니다. 그때 대검에서 민통련을 과격단체로 몰고 과격단체의 두목으로 이 문익환이를 매도하는 데 충격받아 그 얘기부터 하느라고 뒤로 미루었는데, (자책하는 심정이 목소리에 나타난다) 얘기 끊고 말문을 돌리려고 주변을 돌아보는데, 그때 떨어져 죽은 겁니다. 그 학생은 미리 유서를 준비해두었고, 제가 강연하는 동안에는 이미 그 자리에 올라가 있었겠죠. 제 얘기가 스피커를 통해 거기까지 다다랐는지도 모르겠고 또 다다랐어도 그의 결심을 바꿀 수 있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부탁을 왜 처음에 하지 못했나? 나중에 학생이 분신한 것을 알고 가슴을 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저는 영원한 죄인입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입니다. 나는 그때 죽었고 남은 생은 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대구에 강연이 있어 내려갔다가 내가 도피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바람에 자진출두한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얘기부터 해야 할 심정이었습니다. 이제 마음 가다듬고 "나는 죽고 남은 생은 너를 위해 살겠다"는 심정으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문 목사 자리에 앉는다.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10시 15분) 꼭 10년 만에 이 법정에 섭니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사건 때 계셨던 변호사들 얼굴도 보이고, 방청석에 동료 피고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우리나라는 변하지 않아 민주화를 위해 일한 이유로 다시 이 자리에 온 것이 서글프다면 서글프고, 억울하고, (조금 격해졌다) 또 통탄스럽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저는 그때 법정에 앉아 형을 얼마나 받을까, 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죄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정부와 대화하는 자리로 생각하고 재판에 임했고, 정부에다 대고 하고 싶은 얘기를 했습니다. 또 사법부가 행정부로부터 탄압받는 약한 국민을 보호해주는 사법부다운 사법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했고, 정확한 판단을 요청했습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주는 무법천지가 아니고, 인권이 보장되는, 법이 보장되는 나라, 그래서 세상을 향해 긍지를 가지고 살기를 바랐습니다. 1심, 2심 모두 최선을 다했으나 결관는 유죄였습니다.

1978년에도 다시 설 뻔햇습니다. 유신 여섯 돌에 유신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고 구속됐을 때였습니다. 그때 계훈제 선생을 병동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검찰이 기소중지하고 형 집행정지를 푸는 바람에 재판은 못 받았습니다. 긴급조치 9호로 5년 받아 3년을 살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1980년 봄입니다. 무시무시한 군사재판이었습니다. 제 옆에는 사형을 받은 분이 계시고 나는 20년을 구형받은 재판이었습니다. 할 만한 변호사들은 모두 자격이 박탈되어 저는 국선변호사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재판이지만 생명 못지않게 저는 1976년 재판 받던 심정으로 임했습니다. 정부와 대화를 트고, 내 심정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재판을 제대로 해서 법치국가임을 알려달라, 2심 시작할 때 저는 그 얘기를 했습니다. 이제 5공화국이 시작하는데 이 재판이 시금석이니 법치국가임을 세계에 알려달라, 제대로 재판해달라! 그러나 역시 그대로 유죄였습니다. 이번에도 또다시 정부와 대화하면서 정부에 국민의 주권을 알리고 국민의 의사를 밝히는 자리를 만들고, 또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제대로 재판해서 법치국가를 만드는 것을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나 생각하다가 이 생각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보니, 아버님이었습니다. 그분은 90세 인생을 오직 이 겨레를 위해 살다가 가신 분입니다. 아버님은 계속 청와대를 향해 편지를 쓰셨습니다. 아들 둘을 번갈아 잡아넣는 청와대에 편지를 계속 보냅니다. 그래 제가 그랬습니다. "아버님, 뭐 하러 쓰세요.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들어갈 텐데……." "그래도 쓴다. 듣든 말든 나는 내가 할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약을 내리는 상감을 향해 상소문을 올리는 충신 모습, 민주국가의 주인의식, 민주시민의식을 보았습니다. 아버님의 편지, 그것이 모르는 새에 내게 와 있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제가 징역 살고 있는 동안 아버님은 저에게 편지를 보내 감옥에서 저랑 같이 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번에 서대문(형무소)에 걸어 들어가 옷을 벗는데 잠바가 아버님 것이고, 신발도 아버님이 신던 신발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이제 아버님하고 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아버님하고 많은 얘기를 나눕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여쭸더니 "예전과 같이 국민된 도리를 다해 사법부를 도와라"고 하셔서 (재판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하니, 공소장 받던 날이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요. 왜 안 되느냐? (조금 격해졌다) '민통련을 깨려는 재판이다. 각본에 의해 깨려고 민통련 의장을 끌어냈다. 민통련 깨려는 각본으로 만들어진 재판에 내가 꼭두각시놀음에 춤추는 꼭두각시 아니냐? 못 나가겠다.' 아버님도, "그렇기도 하겠군" 하세요. 민통련 의장인 나를 구속하고, 부의장인 계 선생을 조사하고, 전 간부를 수배하고, 이건 지방조직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민통련을 깨려는데 이런 놀음에 놀아날 수는 없다. 안 그렇습니까? 판사님? 꼭두각시로 춤을 출 수는 없잖아요?

 민주구국선언사건에서 우리는 재판에서는 유죄를 받았지만 역사의 재판정에서는 무죄를 받았습니다. 민주구국선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민주화해라. 그래 빈익빈, 부익부를 시정하고 민주주의의 신념을 회복하고 통일의 길을 닦으라는 겁니다. 판사님, 그것이 죄가 됩니까? 삼척동자도 알아요. 죄가 아니라고. 그런 정부에 대한 충언을 전 대통령 윤보선 씨, 이 나라의 양심 함석헌 선생,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 우리나라 의회의 상징 정일형 박사 등이 서명을 했는데 전 대통령까지 정부에 대한 충언으로 죄를 받아야 합니까? 우리를 그 일로 감옥에 보낸 박 정권의 말로, 그 비참한 말로를 봤습니다. 유죄를 받은 우리는 무죄가 되고 우리에게 죄를 준 사람들은 유죄를 받았습니다. 78년 유신의 비민주성을 밝힌 성명사건도 역사는 저에게 무죄를 언도했습니다. 제5공화국이 유신헌법이 비민주헌법으로 나쁘다고 폐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때 유신을 비판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를 잡아넣은 사람이 유죄가 됐습니다. 1980년 사건도 마찬가집니다. 공산주의자인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 내가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것인데, 이 정부가 김대중 씨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공산주의자라면 소련이나 중공에 보내야지 왜 미국에 보냅니까? 또 국내에서 활동 중인데 공산주의자라면 잡아넣어야지 왜 그냥 둡니까? 그것으로 80년 재판도 뒤엎은 겁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무죄를 언도한 겁니다. 저는 무죄입니다. 무죄이면서도 고생하고 있는 천여 명의 양심수들은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늘어날 것인가? 저는 그들과 같이 유죄를 받고 역사에게 무죄를 받을랍니다. 역사에 세 번 무죄를 받은 문익환은 유죄를 받고 손에 시커먼 것을 묻혀 손도장을 찍겠지요. 저는 천여 명 유죄받은 양심수를 위해 손도장을 찍습니다. 그들이 유죄이고 내가 무죄라면 혹시 사람들이 그들이 정말 유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유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국가보안법을 추가로 적용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무죄 여부를 놓고 검사와 싸움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셋째, (그러니까 민통련 와해가 첫째, 천여 명 양심수가 둘째가 되겠다.) 저는 세 번이나 남들보다 먼저 나온 무정한 사람입니다. 들어와본 사람 아니면 정말 모릅니다. (감정이 높아 잘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나가고 뒤에 남을 때 받는 충격, 판사님은 모를 겁니다. 나와서 (교도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족을 만나면 나는 죄인입니다. 그들을 남기고 먼저 나왔나? 부족한 사람이지만 부족한 대로 구속자 가족들을 보살피려고 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들을 뒤에 남기고 먼저 나갈수는 없습니다. 천여 명 양심수들을 먼저 내보내고 늙은 사람, 나 이제 칠순이 다 됐습니다. 인생 다 산 내가 나중에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청석에서 한숨 소리 들린다.) 저에게 국가보안법을 추가적용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법에는 형평의 원칙이 있습니다. 제가 법 전문가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나 그런 것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민통련의 총책입니다. 내가 모르고 이루어진 일이 없고 따라서 민통련의 모든 움직임은 내 책임입니다. 7·4공동성명 14돌 성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데, 그 성명은 제가 낭독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누군가가 처벌, 구류를 받았습니다. 일사부재리원칙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민통련의 운동론 문제인데, 제가 정책연구실장 장기표에게, 전 지시라는 말은 쓰고 싶지 않습니다, 부탁해서 그가 기초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장기표)이 기소됐고 수배된 간부들이 잡히는 대로 국가보안법으로 모두 기소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까? 신 검사님, 저를 국가보안법으로 추가기소해주십시오. 안 하면 직무유기입니다. (방청석에서 웃음이 인다.) 운동론에서 문제된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산수단의 공유화이고, 하나는 민중봉기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장기표와 근본적으로 견해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 검사님, 법정에서 공식으로 요청합니다. 저에게 국가보안법을 추가적용시켜주십시오. 이것은 우선 민통련의 토론과정을 먼저 얘기해야 합니다.(김영삼 고문이 검사 출입구로 입정한다. 10시 30분. 김종완 씨가 자리를 양보한다. 1~2분 후 박영록 씨도 뒤따라 입정한다.) 민통련은 24개 단체의 연합체입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위시한 전국 인권민주단체의 연합으로, 모든 단체를 다 망라했다면 지나친 얘기겠지만 민통련에서는 새로운 정책 수립이나 전략 전환 때는 24개 단체 모두의 인준을 받아야 합니다. 장기표 군이 작성한 운동론을 토론하기 위한 1차 독회 때 저도 참석 요청을 받았으나 지방강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지도부 몰래 평양 지향의 정책으로 가려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도 참석 요청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뒤쪽 방청석 입구 밖에서 '불법재판 거부하라!'는 구호가 들린다.) 정책은 24개 단체의 인준을 받기 전에도 문제가 있으면 중앙위원회의에 회부되어야 합니다. 이때 정책위의 임무는 운동 면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 문제점을 토의에 붙이기 위해 제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표 실장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제안된 것을 토의하고 결정하면 운동론이 정립되는 것입니다. 항상 당시에 논의되어야 할 것을 기초할 책임이 장기표 실장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운동론은 1차 독회하고 더 논의되어야 한다고 해서 해산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면 세부 내용에서 생산수단의 만인 공유화를 보면, 생산수단의 만인 공유화는 기독교윤리의 기초입니다. 저는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기독신앙으로 신봉해온 사람입니다. 기독교인은 나의 모든 것, 재산, 건강, 심지어 생명까지 내 것으로 사유하는 것은 죄악으로 압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즉, 만인의 것입니다. 재산, 건강……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느님이 맡긴 것을 관리하는 겁니다. 이게 청지기 직분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받아 관리하여 하느님의 자녀 - 모든 세계 사람들, 우리에게는 한국인입니다 - 를 위해 써야 합니다. 만일 생산수단의 공유화가 공산주의라면 전 기독교인을 공산주의자라고 판단하는 겁니다. 나는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신봉하는 사람이니 그들을 기소하자면 저도 하십시오. (이때 밖에서 다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뒤에 들은 바로는 방청석이 찼다는 이유로 입장을 제지하여 심한 몸싸움 끝에 박형규 목사, 구속자 수배자 가족들이 다수 입장했다.) 공산주의에서 얘기하는 것은 공유화가 아니라 국유화입니다. 국유화는 공유화의 한 방식이나 결함이 많은 방식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 국유화가 없습니까? 많습니다. 미국의 경우, 전신, 전화, 철도는 사유이나, 한국은 국유입니다. 요즈음 말썽 많은 담배도 미국은 사유이나 우리는 국영입니다. 발전시설도 미국은 사유이나 우리는 한전-반(半)국영입니다. 제가 자세히 조사하지 못해서 얼마나 되는지 더는 모르겠습니다. 미국 경우 국영은 체신뿐입니다. 그렇듯 국가 사정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되어 있는데 생산시설의 공유화를 얘기했다고 빨갱이로 몹니까? 언어도단이에요. 최근에 감옥에서 중공에 주식시장이 열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중공이 공유화(국유화를 잘못 얘기하는 것 같다) 정책을 버렸나? 아닙니다. 공유화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조하려고 한 것으로 봅니다. 미국 주식의 50퍼센트 이상을 가정주부들이 갖고 있습니다. 가정주부들이 생산시설의 주인일 겁니다. GM의 소제부가 주식을 사면 사장에게 불신임투표를 할 권한이 생깁니다. 새로운 사장을 뽑을 투표권도 갖게 됩니다. 사장은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 운영능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거로 뽑히는 사람입니다. 물론 주식의 첫 목적은 돈을 동원하는 데 있었지요. 그러나 결과는 공유화가 된 겁니다. 중공도 돈을 동원하고자 하는 목적일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으로 민통련을 평양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좋습니까? 세계의 모든 공산국가들이 국유화문제로 고민 중에 있습니다. 심각하게 궤도 수정을 검토 중입니다. 유고가 그랬고 루마니아, 동구라파 많은 나라들이 그렇고, 서구의 공산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련이 중공과 화해하자는 것도 저는 중공의 변화가 소련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인 추세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벌써부터 자본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시험해온 것이 사회민주주의 아닙니까? 노동당이 집권하기도 하고 보수당이 집권하기도 합니다. 호주에는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조류에 저항하는 나라가 미국과 일본입니다. 그들도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한계는 미국이 채권국에서 채무국으로 전락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제1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그 중 대표격인 미국이 곤란하니까 7개국 정상회담이 미국 요청으로 열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모두들 미국을 도와줄 여유가 없습니다. 자기들 앞의 국가이익 때문에 협조를 못 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 같은 약소국들이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보험, 증권, 은행, 담배, 저작권 등 모두가 미국 자본주의의 한계에서 오는 몸부림을 우리가 떠맡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자본주의가 한계에 와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화 가능성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자본주의는 자본이 굴러 확대되는, 계속 굴러 확대되어야 하는 자전거 생리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의 공장은 국내, 세계 수요를 넘어섰습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군수산업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평화에 위협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일본에 가서 평화헌법을 고치라고 했다는 얘기 듣고 저는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생각했습니다. 이 정부의 본질을 그대로 보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할 수 있는가? 일본 제국주의에 고생한 모든 국가들이 빗발치는 항의를 할 것입니다. 나카소네까지 곤경에 넣는 이러한 제안을 어떻게 했는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한국에서 민통련이 할 일은 무엇인가? 민족통일을 주요 과제로 생각하고 두 체제 사이에서 민족의 살 길을 저항하는 것, (단호하게, 격하게) 민족주의입니다. 평양을 향한 게 아닙니다. 저는 장 실장의 심정을 이렇게 (위와 같이) 단정합니다. 요새 헌법을 논의하고 있는데 민통련이 정한 민주헌법의 조건은 첫째 대통령직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