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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지지 않는다는 말 - 김연수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새을 바꿨다.

- P9.

 

몰아치는 바람 앞에서도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꼿꼿하게 서 있다면,

그건 마음이 병든 나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 순간 달라지는 세계에서는 우리 역시 변할 때 가장 건강하다.

단단할 때가 아니라 여릴때.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늘을 볼 때마다 내가 여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한다.

여리다는 건 과거나 미래의 날씨 속에서 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는 매 순간 변하는 날씨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날마다 그날의 날씨를 최대한 즐기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 P41~42.

 

커피 한 잔을 마실 동안, 의자에 앉아서 나는 이슬비가 흩뿌리는 창밖을,

혹은 갖가지 색깔의 분필로 메뉴를 적어 놓은 칠판을, 언제 붙여 놓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낡은 액자를 바라봤다.

10평 정도 되는 실내에는 사람들이 들어와 나처럼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잠시 앉아 있었다.

때로는 서서 커피를 마시며 카페 주인과 얘기를 좀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친구와 마주보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나처럼 커피 한 잔을 마실 시간만큼만 보내기 위해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이따금 사람들과 자동차와 개들이 오가는 거리를

바라보는 일이 그렇게 좋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 P53~54.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넣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 P54~55.

 

여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일어난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넘겨짚고,

현지인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우린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었다.

내게 여행이란 나 역시 이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이 태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여행지가 집처럼 느껴질 때라고 생각한다.

- P119~120.

 

대개 어른들이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 위주로 생활하면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늙을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해야만 한다.

- P166.

 

운세라는 건 반경 0.5킬로미터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운세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갈 수 있느냐, 없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

- P246.

 

주택가 옆 작은 신사를 빠져나오는데 일본인 친구가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더 많은 일들이 내게 일어나기를,

그리고 그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고 대답했다.

예컨대 어떤 일이냐고 그 친구가 내게 물었다.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이 변하는 날씨처럼, 늘 살아서 뛰어다니는 짐승들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처럼.

그처럼 단 한순간도 내가 아는 나로 살아가지 않기를,

그러니까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있으면 그 언제라도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 P246~247.

 

그렇다면 젖지 않는 방법은, 쓰러지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나 자신이 너무나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겁내지 않는 상태.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는 상태.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대단히 가슴이 떨린다.

왜냐하면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안 되는 일이니까.

그제야 나는 용기란 한없이 떨리는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게 바로 세상의 모든 영웅들이 한 일이다.

- P270.

 

지금 이 순간, 뛰지 않는 가슴들도 모두 유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공기를, 더 많은 바람을, 더 많은 서늘함을 요구해야만 한다.

잊을 수 없도록 지금 이 순간을 더 많이 지켜보고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더 많이 맛보아야만 한다.

그게 바로 아침의 미명 속에서도 우리가 달리는 이유다.

그게 바로 때로 힘들고 지친다고 해도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 이유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 삶을 마음껏 누리는 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이고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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