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늘 다른 사람의 몸 위에서 자신의 몸을, 그것의 길이를, 자신의 향기를 알게 된다.
처음엔 경계심을 갖고, 나중엔 고마워하면서.
- P.15
나는 독서를 했다. 저녁이 되었다.
책을 내려놓고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자줏빛에서 잿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 자신이 연약하고 무장해제된 것처럼 느껴졌다.
내 인생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비웃었다.
내 뺨에 누군가 기대어오면 나는 그를 붙잡아둘 것이다.
나는 그를 내 몸에 대고 사랑의 비통한 격렬함으로 꽉 껴안을 것이다.
나는 베르트랑을 탐낼 만큼 충분히 파렴치하지 못했다.
그러나 행복한 모든 사랑을, 열광적인 모든 만남을, 모든 노예 상태를 탐낼 만큼은 충분히 슬펐다.
나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 P. 47
양식(良識)이란 일들이 되어가도록 혹은 되어가지 않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항상 상황을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그냥 조용히 용감하게 있으면 된다고.
나는 이 불성실한 생각에 만족하며 가르랑거렸다.
- P.65
난 이게 멋지다고 생각되는걸요. 이런 가느다란 선들로 이루어진 두 개의 근육을 갖기 위해 그 모든 밤,
그 모든 고장, 그 모든 얼굴이 필요했잖아요.
당신은 이것들을 쟁취한 거예요. 그것때문에 활력 있어 보이고요.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나는 이것들이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하고, 사람의 마음을 끈다고 생각해요.
주름 없는 매끈한 얼굴은 무서워요.
- P.67
그리고 내가 무척 지루해했어야 할 이 집을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집에서 지루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리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 좋고 창피하지 않은 지루함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아주 친절하고 정중하게 굴었다. 그런 상태가 기분 좋았다.
이 가구에서 저 가구로, 이 들판에서 저 들판으로, 하루에서 또 다른 하루로 옮겨다니는 것,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부동성의 힘으로 얼굴과 몸 위에 일종의 감미로운 그을림을 획득하는 것,
여름방학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서 기다리는 것. 책을 읽는 것.
여름방학은 노랗고 무미건조한, 거대한 점이었다.
- P.99~100
"우린 피곤할 때만 마음이 편하군." 뤽이 말했다.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한 명인 것은 사실이었다. 생명력의 어떤 부분,
요구가 많고 권태 때문에 무거운 부분이 속에서 죽어버렸을 때만 비로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부류.
그 부분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네 삶을 어떻게 할 건데? 네 삶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데?'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아무것도.'
- P.123
갑자기 바다가 안개 속에 잠겨 보였다. 나는 숨이 막혔다.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다. 머리카락도 뿌리까지 땀에 젖어 있었다.
땀 한 방울이 등허리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틀림없이 죽음이 이럴 것 같았다. 파란 안개, 가벼운 추락.
나는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발버둥치지 않을텐데.
- P.124
"그럼 무엇을 할 시간이 있는데요?"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시간도 없고, 힘도 없고, 욕구도 없어.
내가 무엇이든 할 능력이 있다면, 난 너부터 사랑할 거야."
"그러면 무엇이 바뀌는데요?"
"아무것도. 우리에겐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을 거야. 나는 결국 그럴 거라고 생각해.
다만, 난 너 때문에 불행해지겠지. 그래도 난 만족할 거야."
- P.165
나는 아주 주의하며 내 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음악은 끝나 있었고, 나는 음악의 끝부분을 놓친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놀랐다. 미소 짓는 내가 보였던 것이다.
미소 짓는 나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혼자라는 것.
나는 나 자신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혼자, 혼자라고.
그러나 결국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였다.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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