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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제 곧 우리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거야,

우리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사실 이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개는 이름을 가지고 다른 개를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개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개는 냄새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또 상대방이 누군지도 확인하지,

여기 있는 우리도 색다른 종자의 개들과 같아, 우리는 으르렁 거리는 소리나 말로 서로를 알 뿐,

나머지, 얼굴 생김새나 눈이나 머리 색깔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래도 지금은 내 눈이 보이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

- P.85~86

세상의 모든 다툼이 이와 같았으면. 그러면 그냥 어떤 합의에 이르기만 하면 되는데.

이 번 침대는 내 거요, 당신 것은 삼 번이오, 그 점을 분명히 해 둡시다.

우리가 눈만 멀지 않았다면 이런 혼란은 생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이 맞소, 문제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는 거요.

의사의 아내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기에 온 세상이 다 들어와 있어요.

- P.140~141

노인은 계속 주파수를 돌렸다. 작은 상자는 계속 소음을 뱉어냈다.

이윽고 노인의 손이 한군데서 멈추었다. 노래였다. 아무 의미 없는 노래였다.

그러나 눈먼 사람들은 천천히 주위에 모여들었다. 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앞에 다른 사람의 존재가 느껴지면 그 순간 발을 멈추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귀를 기울였다.

크게 뜬 눈들은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나오는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샘에서 물이 흐르듯 그냥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마 눈먼 사람만이 그렇게 울 수 있지 않을까.

- P.170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그가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 P.184~185

어떻게 된 거야, 의사가 물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하던데.

그래요, 내가 죽였어요. 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이 나 말고는 없었으니까요.

그럼 이제는. 이제 우린 자유예요,

이제 저놈들은 다시 우리를 학대하려고 할 경우에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알고 있어요.

전투가, 아니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눈먼 사람들은 늘 전쟁을 하고 있어요, 늘 전쟁을 해왔죠.

또 죽일거야. 죽여야 한다면요, 나는 이 눈먼 상태로부터 절대 자유로워지지 못할 거예요.

먹을 것은 어떻게 됐어. 이제 우리가 가져올거예요, 저자들은 감히 이리로 나오지 못할 거예요,

적어도 앞으로 며칠 동안은, 자기들한테도 똑같은 일이 생길까봐, 가위에 목이 찔릴까 봐 겁을 먹고 있을 거예요.

그들이 처음 요구했을 때 당연히 저항했어야 하는 건데, 그걸 못한 거야.

물론이예요, 우리는 두려웠고, 두려움이 늘 지혜로운 조언자 노릇을 하는 건 아니죠,

돌아가요, 안전을 위해 병실 문에 침대로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려야 해요, 저놈들이 하는 것처럼요,

안됐지만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은 바닥에서 자야 할 거예요,

하지만 그게 굶어죽는 것보다는 낫죠.

- P.271~272

아가씨는 저 가엾은 노파를 못 보았어, 그냥 아파트에서 나는 악취만 맡았을 뿐이야,

내 장담하는데 우리가 전에 살던 수용소도 그렇게 비위가 상하지는 않았어.

조만간 우리 모두 그 할머니처럼 될 텐데요 뭐, 그럼 모든 게 끝나겠죠, 더 이상 삶이란 건 없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어.

사모님은 나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아요, 나는 사모님과 비교하면 무지한 어린애에 불과해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우린 이미 죽은 거예요,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게 그거지만요.

- P.352~353

그건 방금 아가씨 자신이 말한 대로, 만에 하나의 경우야,

게다가 그분들이 여전히 아가씨 부모님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아래층 노파도 원래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면서. 가엾은 할며니.

아가씨의 부모님도 가엾게 되고, 아가씨도 가엾게 될 거야,

아가씨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는 둘 다 눈도 멀고 감정도 멀었을 거야,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모르고,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우리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게 그 얘기야.

- P.353~354

하지만 그것이 집에서 악취가 나는 것보다는 나아요,

수용소 생활을 할 때 우리가 그런 악취 속에서 살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모욕의 모든 단계를 내려갔죠,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르렀어요,

방식은 다를지라도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도 그곳에서는 그런 타락이 다른 사람들 탓이라고 핑계댈 수 있었어요, 지금은 그게 안 돼요,

이제는 선과 악에 관한 한 우리 모두 평등해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고는 묻지 말아주세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 P.387~388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워서, 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서해 줄 구실을 찾으려고 하죠,

우리 차례가 될 때를 대비해 미리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해놓듯이 말이에요.

- P.405

그녀는 아주 작은 글씨들을 훑어보았다.

위로 아래로 춤을 추는 문장들, 종이 위에 기록된 말들,실명 상태에서 기록된 말들,

나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요, 작가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그가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들이었다.

의사의 아내는 작가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작가는 두 손으로 그 손을 잡더니 천천히 자기 입술 위로 들어올렸다.

이윽고 작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 P.413~414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예요,

기다려봐야 해요, 시간을 줘봐야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인생이에요.

- P.449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P.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