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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퀴즈쇼 - 김영하

 

정말 불운은 다양한 얼굴로 다가온다.

그래서 인간의 예지력으로는 그것이 다가온다는 것을 감지하기 어려운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불운, 즉 불우한 운명이다.

- P.65

 

그가 책을 싣고 떠나자 집이 정말로 휑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 집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저 책들이 아니었을까?

어떤 책들은 나보다 더 오래 이 집에 살았을 것이다.

아마 내 엄마가 태어나는 것도 지켜봤겠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가 들춰봤을 책들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그들 영혼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우리는 책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책이 우리를 보는 건지도 몰라.

책이 인간을 숙주로 삼아 잠시 머물다가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나는 것일지도.

- P.67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도시의 어둠은 산야의 어둠과 달랐다.

어쩔 수 없이 어둠에 자리를 내주고 퇴각한다는 식이 아니라

어둠이 빛 사이로 몰려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시골에서처럼 어둠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세상을 덮는 게 아니라

발목을 적시면서 무릎부터 차올라 어느새 세상이 그 어둠 속에 잠겨드는 것이다.

- 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