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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

 

 

너에게 붙여진 이름은 알아도

네가 가진 이름은 알지 못한다.

- 증명서

 

오 하나님, 저는 그저 사무보조원일 뿐입니다.

오십이 되도록 정식직원도 못된 보조원일 따름입니다.

제가 만일 저 책장 속에 보관되어 있는 백 명 중의 하나, 아니 그보다 덜 유명한

다섯 명의 후보자 중 한 사람이기만 해도 이런 수집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왜 갑자기 저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기록부를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 중요한 것처럼 바라보고 있느냐,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 P.34

 

결혼에 몇 사람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드리죠, 둘입니다, 남자와 여자,

아뇨, 결혼엔 세 사람이 존재해요, 여자와 남자와 그리고 내가 제삼자라고 부르는,

가장 중요한, 남자와 여자가 함께함으로써 존재하는 또 다른 한 사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 중 하나가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며 너무나 깊은 충겨을 가져다주는데

그것은 다른 한 사람에게만이 아닌 두사람,

즉 부부라는 이름의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이지요,

두 사람으로 인해 만들어진 그 관계만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

이미 나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지만,

그러나 결혼의 가장 중요한 점은 남자나 여자, 혹은 서로가

각각의 옆에서 서로를 지켜봐주는 데 있는 것이란 얘기예요.

- P.61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다른 게 없죠,

나타났다가, 얘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진사들에게 미소를 짓고,

항상 타났다 사라지곤 하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모든 사람들은, 이곳저곳에 나타나, 얘기를 하기도 하고,

집을 나섰다간 그곳으로 돌아가죠, 가끔씩 웃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우리 모두가 유명인이 될수는 없죠,

다행한 일이네요,

선생님의 수집이 등기소만한 크기가 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더 클 수도 있죠,

등기소는 단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홀몸이 되든, 등기소에선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요,

그런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행복과 불행은 마치 유명인들과 같은 거예요, 인기가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등기소에선 우리가 누군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에게 우리는 몇 개의 글자로 된 이름과 날짜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 P.206~207

 

우리들은 죽은 자와 산 자를 한곳에 모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부적 지시를 여러분에게 내리겠습니다,

먼저, 지금부터 죽은 자들의 서류들은 살아 있을 때의 자리와 같은 곳에 보관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최근 것부터 가장 오래된 것까지, 하나하나의 서류들이 모이게 되면,

보관 창고 속의 오래전 죽음도 모두 현재의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작업은 수십 년이 걸리는, 아마도 우리가 죽은 후에나,

혹은 우리의 후세대들도 완성하지 못할, 힘든 작업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괸 죽은 자의 서류는 낡아지고, 수세기 동안의 먼지로 검게 변해,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아갈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완전한 죽음은 망각의 열매이고, 삶이란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 P.220~221

 

지금까지 일어났던 이 모든 일들의 유일한 논리적 해결책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소장님,

이 모르는 여자를 위해 새 기록부를 만드는 거야,

옛날 것과 똑같이 정확한 날짜를 기입한, 그렇지만 사망일은 쓰지 말고,

그리고는요,

그 다음엔 산 자의 기록 보관함에 꽂아두는 거야, 마치 죽지 않은 것처럼.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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