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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노랑무늬영원 - 한강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 올리는 선 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 P.74~75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 P.91~92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 속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P.123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만일 내가 그 사고로 죽었다면 우리의 다정함이 더럽혀지지 않았을 테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겹도록 아팠고, 내가 지겨운 만큼 그도 지겨워했다. 나를 지겨워하는 그가 나도 지겨웠다. 서로의 얼굴이 지겨워서 종종, 암묵적으로 서로의 눈길을 피했다.

- P.243

 

배만 안 고프면 저 애는 웃거든. 끊임없이 장난할 거리를 찾고, 행복하고, 활기에 넘쳐.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일 때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봐. 우리도 원래는 그랬지만, 그 뒤로 프로그래밍이 된 상태니까 원래의 상태를 잊고 사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가…… 그런데 기억이 안 나니까.

뭐가?

나는 대답한다.

내가 저만했을 때, 어땠는지.

……기억할 수 없는 시절은 정말 무의식 속에 들어가 있는걸까? 그렇다면 좋겠어. 그런 자연스러운 상태가 숨어 있다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우릴 도와준다면.

- P.290~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