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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낯익은 세상 - 황석영

 

 

하나씩 쥐어보면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물건들이었는데도 떨어져나온 아기 인형의 다리처럼 어쩐지 무서운 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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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야 그는 그런 것들이 찌그러진 콜라 깡통이나 잇자국이 남은 담배꽁초가 담겨 있는 소주병처럼 도시에서 버려진 것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무엇이든 제각기 슬픔이나 아쉬움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게 딱부리를 더욱 낯설고 무섭게 했는지도 모른다.

- P.42

 

엄마가 다른 남자와 잔다고 성질을 내봤자 여기는 주소도 번지수도 없는 땅이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모두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도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재생공장 같은 데라도 찾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 P.53

 

못 살 데가 어디 있겠냐. 돈 없으면 어디나 못 살 데가 되는거지.

- P.121

 

자고 일어나도 언제나 고약한 냄새며 먼지와 파리떼에 괴물같은 덤프트럭들이 쏟아내는 온갖 물건들의 추악한 형상에 비하면 무서울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제는 갈퀴 끝에서 어떤 동물의 썩은 몸통이 나와도 발치로 휙 밀어내버리면 곧 다른 물건에 뒤덮여버리곤 했다. 사람들이 쓰다 버린 물건의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그것들은 생선 머리처럼 원래의 모양을 잃고 복잡하고 자잘하게 분해되어 있어서 기계가 처음 만들어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괴한 사물로 보였다. 아아,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다. 딱부리는 달빛에 드러난 풀숲을 내다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릴 뻔했다.

- P.122

 

달은 이미 중천에 높이 걸렸고 온 세상이 하얗게 되었다. 달빛이란 전깃불 빛과 달라서 추한 것들은 적당히 감춰주고 강이나 나무나 풀이나 돌멩이와 물건들까지도 친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P.124

 

딱부리는 아버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라에서 새사람을 만들어 내보낸다는 무슨 교육대에서 언제까지 붙잡아놓고 있을지 모르지만 새사람은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했다. 언젠가 산동네에서 그런 소식을 듣고 새사람이 되는 게 무슨 뜻이냐고 편지 배달해주는 집배원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바르게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쓰레기장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사람들이 돈 주고 물건을 마음 내키는 대로 사다가 쓰고 버린 것처럼 자기네도 더이상 쓸 데가 없어져서 이곳에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147

 

겨우 일차적 성취를 끝내고 나는 높다란 성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다시 이르렀다. 이미 내가 걸어온 길은 화면 밖으로 밀려나가 돌아갈 퇴로도 없다. 이것은 무수하게 반복되는 행진이며 최대의 성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 성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 있는데 뒷전에서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얘야, 가지 마라. 그럴듯하지만 이건 꾸민 거란다. 뒤를 돌아보니 김서방네 할아버지가 서 있다. 여긴 웬일이세요? 내가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말한다. 사람들이 그 길로 가다가 모두 망쳐버렸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호되게 값을 치를 게다. 온 세상의 산 것들과 물건들이 너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나는 그리운 꿈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외쳤다. 할아버지네 동네에 가본 적이 있어요. 거긴 여기와 다른가요? 암, 다르구말구. 우리 동네는 언제나 너희 곁에 함께 있는 곳이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가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 거야.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오리 한 마리, 산과 강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고 너와 똑같단다. 여기서는 모든 물건이 장애물이고 싸워서 없애야 할 괴물에 둘러싸인 너 혼자뿐이로구나. 이쪽 길은 너를 끝없이 쫓아내려 하고 성취에 길들이려고 하지 않니? 그냥, 출발하지 말고 나가버리면 될 텐데……

- P.207~208

 

이런 못쓰는 물건들을 왜 소중하게 감춰두는 거예요?

서루간에 정들어서 그러지.

그럼 저어기 쓰레기장 물건들은요?

빼빼엄마는 검댕이 잔뜩 묻은 더러운 얼굴을 돌리고 야멸차게 말했다.

저것들은 사람들이 정을 준 게 아니잖아!

- P.225

 

혼잣말로 중얼기리던 딱부리는 이제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중심가까지 집과 건물과 자동차들과 강변도로와 철교와 조명 불빛과 귀청을 찢는 듯한 소음과 주정꾼이 토해낸 오물과 쓰레기장과 버려진 물건들과 먼지와 연기와 썩는 냄새와 모든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이런 엄청난 것들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사람 모두가 지어냈다는 것을. 하지만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짙푸른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

- P.228

 

불교에서는 백년 사이에 온 세상이 바뀌어 변하고 나타나는 것을 거대한 런던아이(London Eye)처럼 '수레바퀴의 한 회전'에 비유한다. 백년 뒤에는 현재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거기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만 모두 사라지고 앙코르와트의 흔적과도 같이 무성한 밀림과 새와 나비들만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P.223

 

난지도 쓰레기장에 묻혀버린 것은 지난 시대의 우리들의 욕망이었지만, 거대한 독극물의 무덤 위에 번성한 풀꽃과 나무들의 푸르름은 그것의 덧없음을 덮어주고 어루만져주고 있는 듯하다. 도깨비가 사라진 것은 전기가 들어오고부터라는 시골 노인들의 말처럼, 지금의 세계는 우리와 더불어 살아온 도깨비를 끝없이 살해한 과정이었다. 나는 이들 우리 속의 정령을 불러내어 그이들의 마음으로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있는 거냐?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