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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 나카무라 후미노리

 

아직 힘이 모자란 다리를 앞으로 앞으로 움직여 몸을 이동시켰다. 아직 키 작은 나에게 길은 거대하고 거리도 거대했다. 전봇대는 올려다보기가 어려울 만큼 높고 나무들은 큼직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하얀 가드레일은 내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거대한 것 속을 걸어가는 데 절망감을 느끼면서 나는 계속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나는 아직 거대한 거리 안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 P.30

 

사형이라는 건 애초에 확실한 것이 될 수가 없어. 여기까지는 사형이고 여기서부터는 사형이 아니다, 라는 기준선이 애매해서 때와 경우에 따라 달라져버린다고. 억지로 어딘가에 선을 그어봤자 그 선이 절대로 옳은 것이 될 수는 없어. 그런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인간의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 P.64

 

사형이라는 건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그러니 이런저런 모순이 생기지. 모순이 발생하는 것 자체가 그 증거야. 문제는 인간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을, 불가피한 모순이 자꾸 발생하는 것을, 그래도 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 문제는 바로 그거야.

- P.64

 

왠지는 모르지만, 나는 혼자다 하는 느낌이 자꾸 들잖아? ……어느 정도의 고독은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자신 속의 비밀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이래저래 알게 되는 일도 많을 거고. 우리는 다른 인간들보다 생각하는 게 능숙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건 생각하는 거야.

- P.85

 

그래도 너하고 나는, 뭐랄까, 언제나 한편이 되어주기로 하는 건 어때? 그때 화가 나 있더라도, 전혀 만나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둘 중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용서할 수 없어도 끝까지 한편이 되어주기로 한다면…….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살아가기가 쉽거든.

- P.92

 

인류의 근본적인 경향은 확대라고 생각한다. 진보라고들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냥 목적 없는 확대에 불과하다. 수천 년 전부터 인간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명확한 장소가 아니다. 그저 확대할 뿐이다. 생식도 그저 나중의 확대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 경향이 DNA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신이 아니고, 신의 의지도 아니다. 말을 바꾸면 DNA의 의지다. 생물이 탄생했을 때, 그 최초의 계기에 생겨난 의지다. 그곳에는 선도 악도 없다.

- P.105~106 

 

현재라는 건 어떤 과거도 다 이겨버리는 거야. 그 아메바와 너를 잇는 무수한 생물의 연속은, 그 수십억 년의 끈이라는 엄청난 기적의 연속은, 알겠냐, 모조리 바로 지금의 너를 위해 있었단 말이야.

- P.157

 

"자신의 취향이나 좁은 선입견으로 작품을 간단히 판단하지마라." 그 사람은 곧잘 내게 말했다.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이야기를 묶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을 이야기를 활용해 넓혀가려고 노력하는 게 좋아. 그러지 않으면 너의 틀은 넓어지지 않아."

- P.160

 

"자신 이외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을 접해보고 너희 스스로도 생각해봐." 그 사람은 우리에게 자주 그렇게 말했다. "생각하는 것으로 인간은 어떻게든 될 수 있어. 이 세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도 인간은 그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거야."

- P.161~162

 

사형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한 인간과 그 인간의 목숨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 ……사람을 죽인 너한테 모든 책임이 있지만, 그런 너의 목숨에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생각해. 너의 목숨이라는 건 사실은 너하고는 별개의 것이야.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이렇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너는 사형이 될 거고, 우리는 그걸 집행하는 수밖에 없어.

- P.176~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