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책 속 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김연수

 

 

 

"……천애지각이란 단어도 있습디다. 뭔 뜻인지 압니까, 천애지각?"

"내가 국어선생이가. 그걸 우째 알겄나."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라 카는 뜻입디다. 천애지각이라 카는 거는 꼭 우리 같은 사람한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꼭 그 천애지각을 걸어가고 있다 아입니까. 게이코도 어데 이런 길을 걸어가고 있는거 아이겠습니까? 우리맨치로 말입니다."

- P. 39

 

태식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뒤를 돌아다봤다. 태식이 걸어온 길이 눈송이에 지워지고 있었다. 눈송이가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모양을 보니 약간은 허무한 마음도, 또 약간은 무기력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왜 그렇게 편안한 것인지 태식은 알 수 없었다. 하늘에도 눈, 땅에도 눈이니 눈송이가 그만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워버린 셈이었다. 태식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P.40

 

서른을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한때나마. 한때 반짝였다가 기레빠시마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불빛이나마.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나마.

- P.79~80

 

자전거가 비틀거리면서 등에 멘 가방에서 빈 도시락 소리가 났어.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어.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 도시락 소리가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라도 되는 양. 가슴 뛰는 그 느낌 사이로 내가 첫사랑이라고 믿었던 뭔가가 찾아왔지. 모두 깊이 잠든 밤에 몰래 들어온 도둑처럼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그 사랑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 빈터에 자리 잡았지. 레몬즙으로 쓴 글자처럼 뜨거움에 노출되기 전까지는 어떤 글씨가 씌어져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사랑이 내게 찾아온 거지.

- P.104

 

가는 바람이 불어왔겠지. 등나무 잎들이 흔들렸다. 원재는 등꽃이 주렁주렁 매달렸던 자리를 올려봤다. 지난봄, 그 많았던 보랏빛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얼마나 많은 보랏빛들이 저물고 나면 여름이 찾아오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나면 소년들은 어른이 될까? 제 몸이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등꽃 그 빛들은 스러진다. 제 몸이 아름다운 줄도 모르고 소년들은 슬퍼한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원재는 등나무 그늘 아래에 섰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