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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원더보이 - 김연수



불행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기쁨의 순간들을. 자기가 개나 돼지 혹은 곤충이나 벌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들을. 가슴이 터지도록 누군가를 꽉 껴안아 다른 인간의 심장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을, 흡족할 정도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친구들과 배가 아프도록 웃던 순간을, 단풍이 든 산길을 걸어다니고 쌓인 눈을 밟고 초여름의 밤바다에 뛰어들고 공원 벤치에 누워 초승달을 바라보던 순간을, 그들은 죽어가면서 떠올렸다. 그게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들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떠올리는 것.

- P.98


그렇게 늦은 밤에 바깥을 걸어다닌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사방이 적설의 풍경이었음에도 그 밤은 내게 건기의 밤으로 기억된다. 하늘의 별빛과 땅의 눈빛이 서로 환했다. 적설의 풍경을 되비추듯 거기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은하수가 길게 펼쳐졌다.

- P.116


천개의 눈을 가진 짐승이라는 것은 밤하늘을 뜻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나는 얼마나 자주 밤하늘을 쳐다봤을까? 모르긴 해도 수백 번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 첫 밤하늘은 어쩐지 그 밤의 하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뜻한 밤하늘. 새로 난 이처럼 튼튼하고 낯선 밤하늘. 단단하고 차갑고 날카롭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전혀 새로운 밤하늘.

- P.116


"네겐 죽음이 믿음의 문제겠지만, 내게는 납득의 문제야. 나는 그 사람의 시체를 봤어.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사진으로 봤어. 그건 정말이지 끔찍했어. 하지만 그게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라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지.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불경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어. 이 몸은 모래성과 같아 금세 닳아 없어진다. 이 몸은 깨진 그릇과 같아 항상 샌다. 이 몸은 마늘과 같아 몸과 마음을 독으로 태운다. 이 몸은 시든 꽃과 같아 이내 늙는다. 이 몸은 집과 같아 모든 병이 들끓는 보금자리다. 이 몸은 빈 주먹과 같아 어린애를 속인다. 그런 말들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되뇌면서 살았지. 그런데도 사진으로 본 그 시신의 모습이 아닌 멀쩡한 모습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던 시절의 모습으로 그는 밤이면 내 앞에 나타나. 그 사람을 볼 때면 나는 그 구절을 되뇌어. 이 몸은 모래성과 같아 금세 닳아 없어진다. 이 몸은 깨진 그릇과 같...... 하지만 읊조림은 오래가지 못하고 나는 그에게 물어. 왜 죽어야만 했느냐고. 물론 그 사람은 대답하지 않아. 대답할 사람은 그가 아니니까. 그는 죽었으니까 자기가 왜 죽었는지 알아낼 수 없는 거야. 그가 왜 죽었는지는 내가 알아내야만 해. 마찬가지야. 네 아빠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대답할 사람도 네 아빠가 아니라 너야. 그게 바로 이해라는 것이지.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밤마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몇 년 전의 모습일 뿐이고, 손을 뻗어도 그를 잡거나 만지거나 안을 수 없는데 내가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를 이해할 수 없다면, 과연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말하고 강토 형은 입을 다물었다. 비에 젖은 검은 밤이 차창을 스쳐갔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어서 밤은 그렇게 검은지도 모를 일이었다.

- P.163 ~ 164


나도 모르게 가사를 따라 불렀지. 'Imagine there's no heaven'이라고.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천국이 없으면, 우리 위에 하늘뿐이라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싶어서.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 됐구나. 죽는 건 그런 것이구나. 이제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이구나. 그제야 나는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던 거지.

- P.266


두려움이란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걸 뜻합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걸 뜻합니다. 눈이 보지 않고, 귀가 듣지 않고, 입이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건 부정의 문장이 아닙니다. 그건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눈으로 보라는 것이고 귀로 들으라는 것이고 입으로 말하라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라는 말입니다. 일어서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우리는 그 어둠을 지켜볼 수는 있습니다. 어둠 앞에서 용기를 내십시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라도 하십시오.

-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