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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새의 선물 - 은희경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 P.22~23


다시 고개를 제자리에 돌리더니 아줌마는 엉덩이를 한번 들썩여서 등에 업은 아기를 추스른다. 넋 나간 듯 버스 꽁무니를 보고 있던 자기의 현재를 되찾는 신호이다. 그것은 또 자기의 헛된 꿈에 마침표를 찍는 동작이 되기도 한다. 무겁게 발을 끌며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는 아줌마는 언제나 보는 광진테라 아줌마, 그녀였다. 아줌마의 등 뒤에서 그녀의 고달픈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한편 그녀를 바로 그 고달픈 삶에게로 묶어놓은 재성이가 엄마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논다. 재성이가 잡아당기는 대로 가볍게 머리채를 흔들리며 그녀는 뒤웅박이 되어 걸어가고 있다. 뒤웅박 팔자라는 할머니의 해석이 옳았다. 노인과는 지혜겨룸을 할 일이 아니다.

- P.151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을 욕했지만 어디까지나 뒷전에서 저희들끼리 그래보는 것일 뿐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그제야 자기들이 아무리 민주 선거의 원칙을 배워 실천해봤자 '하늘이 볼까 무서워' 고무신 한 켤레 준 후보에게 투표한 할머니가 받아들인 바로 그 현실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시험 문제를 풀 때는 정답을 쓰겠지만 현실에서는 정답을 다른 식으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것으로 세상을 아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믿었다.

- P.213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것과 살인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그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는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살인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살인을 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고 배신자가 되는 것 역시 배신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므로. 그 기회를 받아들이느냐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지만 선택의 전 단계에서 어떤 기회를 제공하느냐는 순전히 삶이 하는 일이다. 배신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만 배신을 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삶의 짓인 것이다.

- P.363


어느 날 나는 지나간 일기장에서 '내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긴 목록을 발견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다 말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면체로서 언제나 흘러가고 또 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삶 속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이며 또 그 믿음을 당연하고도 어이없게 배반당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입을 것인가. 무엇인가를 믿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그 일기를 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삶을 꽤 심각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목록을 다 지워버렸다.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 P.401


숲속에 마른 열매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나무 밑에 있던 여우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호랑이가 그 여우를 보았다. 꾀보 여우가 저렇게 다급하게 뛸 때는 분명 굉장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도 뛰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뛰는 모습을 숲속 동물들이 보았다. 산중호걸인 호랑이가 저렇게 도망을 칠 정도면 굉장한 천재지변이거나 외계인의 출현이다. 그래서 숲속의 모든 동물이 다 뛰었다. 온 숲이 뒤집혀졌고 숲은 그 숲이 생긴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삶도 그런 것이다.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 P.404~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