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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검은 사슴 - 한강

 

 

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글쎄, 이 비유가 걸맞는 것 같진 않지만…… 그런 식으로 터져버리는 거죠. 그래요, 오래 잘 참은 사람일수록 더 갑자기.

- P.269~270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는 혼자 남았으며, 혼자 남은 사람으로서 강하게 생활해왔다. 튜브를 누군가에게 던져주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았으므로 서른을 넘기도록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결정적으로 믿지 않았으며,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빛 속에서도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을 느끼곤 했다. 어떤 외부의 빛도 맨살로 직접 느낄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덩어리가 내 몸을 두꺼운 외투처럼 감싼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오히려 캄캄한 방보다 밝은 대낮의 거리에서, 나를 결박하고 있는 어둠의 무게를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어둠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깊은 수심 어디쯤의 먹먹한 침묵같은 어둠이 내 웃음을 봉하고 몸을 묶었다.

물론 나에게도 외로울 때가 있었다. 때때로 나는 단지 누군가가 내 머리를 만지고, 감겨주고, 목덜미에 묻은 머리카락을 털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미장원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 상태로 시간이 갈수록, 나는 외로움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고 강해졌다. 생채기 위로 세월이 덧쌓였다. 묵었던 상처를 뚫고 새로운 상처가 파이고, 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박혔다. 어떤 환부에는 약도 시간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오로지 익숙해지는 것으로만 잊을 수 있는 통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직장에 들어가 일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오히려 나를 지켜주는 것이 그 동안 나를 결박해온 그 어둠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지하철에서 부대끼다가 역사를 빠져나올 때면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인적 없는 골목을 지나 사층집의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나는 그날의 일들을 모두 잊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적요, 그날 회사 암실에서 인화한 사진 원고를 스크랩할 노트 따위를 생각하며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그리하여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를 켠 뒤 말없는 바다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순간들이 조금씩 모여 나는 차츰 강해졌다. 밤마다 가위에 눌려 홀로 몸부림치곤 하던 학창 시절의 두려움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희석되어갔다.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먼 수면 저편의 세상을 보듯이 나는 살았다. 나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혼자임을 깨뜨릴 수 있는 어떤 가까운 관계도 원치 않았다.

- P.329~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