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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재와 빨강 - 편혜영

 

멀고도 낯선 두 존재가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도 그렇지만 그 관계가 긑나는 것도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언젠가 은하는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멀어지며 더 멀어질수록 빨리 멀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지 몰랐다. 일단 멀어졌다는 것 말고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가 이해하는 것은 고작 그뿐이었다.

 - P.76

 

그를 괴롭힌 것은 법적 혼인관계에 있으면서 잠자리를 가진 것에 대한 도덕적인 죄책감이나 가책이 아니었다. 아내에게 드는 미안한 마음도 아니었다. 사랑에 대한 확인도 없으면서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에게 미안해서도 아니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아내와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이었다. 내키지 않는 비밀을 품은 자의 외로움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마음의 파동에 대해, 여자를 볼 때마다 드는 설렘에 대해, 여자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대해,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조바심에 대해, 마음을 온전히 내비치지 않아 사소한 말 한마디로 여자의 속내를 짐작해야 하는 외로움에 대해, 그 모두에도 불구하고 여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도 아내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아내라면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준 후에 그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지 어떤지, 자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그 사랑이 결국에는 그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분명하게 일러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누구보다 아내에게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 P.98~99

 

공원에 온 후 처음 며칠간 그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도대체 자신이 왜 그런 음식밖에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지 비통해하느라 그랬다. 곧 비통함은 허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부랑하는 처지라면 음식에 대해 어떤 자의식도 가져서는 안되었다.

- P.119~120

 

방역복을 입었다는 것은 남들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는 의미였다. 남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 P.195

 

그는 여전히 쥐가 무섭고 두려웠다. 처음에는 자신이 쥐와 같은 처지라는 게 무서웠고 나중에는 쥐를 잡을 때에만 쥐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를 느끼게 되어, 그 안도감 때문에 틈나는 대로 쥐를 잡으려고 하는 게 무서웠다. 쥐 한마리가 이끈 우연의 행보가 두려웠고, 그 행보를 원망하듯 어떤 독한 약이나 험한 매질에도 죽지않는 쥐를 끝끝내 죽이고 싶어하는 자신이 무서웠다.

- P.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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