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기/책 속 글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짙은 안개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새파란 하늘을 그리워했다.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꿈에 그렸다. 사실로 내가 그리워한 것은 황색 그림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상이나 미학적인 어떤 음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색이 있는 민족의 환영, 그들의 비극이 내 속에 담겨져 있고 그들의 대표자로 내가 여기에서 간주되고 있는 그러한 절실한 비전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였다고 해도 좋다. 강의실 내에 교수의 방언과 노령에 의한 발음의 불명료 그리고 생활 필수품점 속에 진열되어 있는 셀로판지에 담긴 이탈리아 쌀 그 어디서나 비전은 나를 따랐다.

- P.22

 

마침 그림처럼 둥근 레몬 달이 내 눈앞 흰봉우리 위에 와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지구 아닌 다른 별 속에 혼자 와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내가 말할 수도 없이 조그만 미립자로서 별 속에 놓여 있는 것 같았고, 자연이 기이하고도 위대하고도 정답게 마치 동화 속의 거인같이 느껴졌다. 이 처절한 빛을 띠고 있는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빙산의 끝없는 대양과 그 위에 걸려 있는 영원한 램프 - 달을 바라볼 때 나는 빙하시대와 우리 사이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큰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며 기술의 어떤 발달과 지성의 어떤 훈련에도 불구하고 필경은 우리와 자연과의 인식이 아니라 숭배와 감동 따라서 겸허와 경건의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누를 수가 없었다.

- P.89~90

 

무서운 불안과 공포감을 가지고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그들은 마취를 찾는다. 절대로 혼자여서는 안되니까, 고독만은 필사적으로 피해야 하니까,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 무서운 것이다. 중세기를 벗어난 사랑에서 남은 것은 성뿐이다.

- P.128

 

인류는 도대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어떤 작가도 말하고 있다. 그것을 모아서 읽어 보니 '금일의 젊은이들은 근본적으로 부패해 있다. 그들은 악하고 불신자이며 게으르다. 그들은 다시는 그 이전의 젊은이들같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간직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 기왓장에 쓰인 글은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쓰인 것으로 감정되었다 한다. 결국 누구나가 자기의 쥐덫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쥐덫, 그리고 그 밖으로는 인류의 운명이라는 역사성, 시간성의 쥐덫이 놓여 있다.

죽음을 내포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현명한 케스트너가 가르치듯 밖을 보지 말고 즉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자기의 내부에 파고드는 것, 내적 관조에 의해서 어떤 체념적인 긍정을 얻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이다.

- P.129~130

 

처음에 그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던 것 같은 자신과 포부, 그리고 내 운명이 내 손 안에 있다는 낙천주의 시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가 없어져 버리고 어느새 어떤 기성품의 현실이 열망됨 없이 자기에게 주어져서 그 테두리 속에 들어가 고정되어 버린 것이 나의 회고가 다시금 시인하는 결론인 것 같다.

즉 내가 미치도록 그것이 될 것을 원했던 것으로 되는 대신에 자기가 미쳐 생각지도 못했던 가장 의외의 방향으로 어느새 자기가 형성되어 버린 것을 발견한다.

- P.139

 

그러나 가끔 나는 내 피부 속에서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좁은 껍질 속에 감금되어 있는 정신의 중량이 확 느껴지고 파괴의 의욕을 느낄 때가 있다. 무언지 일격이 내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을 기다릴 때는 그런 때다. 이 반무의식 상태를 활짝 개인 의식 상태로 바꿔주고 이 반소망된 생활을 열렬히 소망된 생으로 만들 무엇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나타날 것을 기다린다. 요술 지팡이를 기다리듯.

- P.140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바하마의 싯구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으로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 P.143~144

 

긴 여행 - 돌아오지 않는 여행, 깨어남 없는 깊은 잠, 이러한 것들이 가을이면 매년 나의 고정 관념으로 되어 버린다. 여름의 모든 색채와 열기가 가고 난 뒤의 냉기와 검은 빛과 조락은 나에게는 너무나 죽음을 갈망하는(Todessehnsuchtig) 자태로 유혹을 보내 온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면 몇 주일이나 학교도 못 나오게 되고 앓아 눕게 된다. 의사는 신경의 병이라지만 나 자신은 내가 '존재에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만큼 절실하고 긴박하게 생과 사만을 집요하게 생각하고 불면 불식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사에 대한 생각이 나를 전적으로 사로잡아 버린다.

- P.152

 

지금도 앞으로도! 꿈 없이는 살 수 없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현실만이 전부라면 인간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무엇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상과 꿈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에게도 뜻밖인 형태로, 동화같이, 분홍 솜사탕 맛같이 느껴지는 유년기, 인식에 모든 것을 바쳤던 10대와 20대. 타자(사회)와 첫 대면한 이래의 여러 가지의 괴로움, 아픔, 상처에 뒤덮인 20대 후반기…….

지금 회상해 보면 한마디로 내가 '어렸었다'는 느낌뿐이다. 꿈이 너무 컸었다. 요구가 너무 지나쳤었다. 나 자신에게 타인에게 우주 전체에게…….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책이 맘에 들때(지금은 그것이 벤의 서간집이다)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 P.155~156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괴로워 하는 일 죽는 일도 다 인생에 의해서 자비롭게 특대를 받고 있는 우선권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스러운 무엇일 것 같다. 괴로워할 시간도 자살할 자유도 없는 사람은 햇빛과 한 송이 꽃에 충족한 환희를 맛보고 살아 나간다.

하루 하루가 마치 보너스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하루 무사히 살아 넘겼구나 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할 때 몹시 감사하고 싶은 - 우주에, 신에 - 마음이 우러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

- P.156

'책읽기 > 책 속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와 빨강 - 편혜영  (0) 2013.08.21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0) 2013.08.21
빛의 제국 - 김영하  (0) 2013.08.17
농담 - 밀란 쿤데라  (0) 2013.08.17
검은 꽃 - 김영하  (0) 2013.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