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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농담 - 밀란 쿤데라

 

 

그래도 집에 여자가 있는 이들에게는 그 휴지 상태 속에 어떤 끈이 이어져 있었다. 그 끈은 아주 가느다랄지도 모르고, 조마조마할 만큼 약하고 너무 쉽게 끊어질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쨌든 끈은 끈이었다. 그런 끈이, 내게는, 내게는 없었다. 나는 마르케타와 완전히 관계를 끊은 상태였고, 가끔 오는 편지도 엄마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뭐라고? 그것은 끈이 아니냐고, 그것이?

아니다. 단지 부모의 집일 뿐인 집, 그것은 끈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과거일 따름이다. 부모로부터 오는 편지란 당신이 멀리 떠나온 육지로부터 오는 전언인 것이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편지는 당신이 떠나온 항구, 그토록 진실되게 공들여 일구어져 있던 환경 속에 있다가 떠나온 항구를 상기시킴으로써, 당신은 길을 잃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는 법이다. 그렇다. 그런 편지는 말한다. 항구가 저기, 그대로, 옛날 모습처럼 분명하고 아름답게, 여전히 거기 있다고. 그러나 그 해안, 해안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고!

P.81

 

슬펐다. 내가 최근에 체험한 사건들은 결코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행동했던 것은 그 일을 어떤 화려한 모험으로 여기고, 그 순간의 기분으로, 또 모든 것을 알고 싶고(고상한 것이건 비천한 것이건) 모든 것을 겪어보고 싶다는 들뜬 열망에서 그랬던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이제 현재 나의 삶을 이루는 근본적이고 일상적인 조건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 사건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엄밀하게 경계지어 놓고 있었고, 이제부터 내게 운명지어진 사랑의 지평이 어떤 것인지 그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자유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가령 1년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렇게 여겨졌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결정되었다는 사실, 나의 한계들, 내가 받은 선고를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이 처참한 미래의 모습, 이 운명이 두려웠다. 내 영혼이 두려움으로 웅크리며 뒷걸음질치는 것이 느껴졌고, 내 영혼이 사방을 포위당한 채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공포에 떨었다.

P.93~94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 삶, 열정적 헌신도 없고 악단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일도 없어져 버린 삶, 인생의 후반부, 패배 이후의 후반부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의 운명은 죽음보다 훨씬 이전에 끝나는 일도 종종 있다는 생각, 종말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야로슬라브의 운명은 이제 그 끝에 이미 도달한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P.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