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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소피의 선택 - 윌리엄 스타이런

 

 

유한한 생명과 유한한 사랑의 힘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강하지만,

그 사랑이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훨씬 더 강해진다.

- 1권 P.449

 

이 아우슈비츠라는 곳은 정말 끔찍한 곳이에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곳이죠.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이 다른 세상에서처럼 선하게 영웅적으로 행동했어야 한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어요.

그가 훌륭하게 행동했다면 다른 곳에서처럼 그를 칭찬하고 존경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나치는 살인마들이었어요.

살인을 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혐오스러운 동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곳에서 사람들이 별로 훌륭하지 않게 행동했다 하더라도,

심지어 짐승처럼 행동했다 하더라도 이해해 줘야 해요.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을 혐오하더라도 동시에 불쌍히 여겨야 해요.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짐승처럼 행동하게 되기가 정말 쉽거든요.

- 2권 P.68~69

 

죄책감. 혐오스러운 죄책감. 소금물처럼 마음에 스며드는 죄책감.

인간은 장티푸스균처럼 죄책감이라는 독소를 평생 몸에 지니고 살 수 있다.

맥알핀의 축축하고 울퉁불퉁한 매트리스 위에 누워 몸을 비틀면서,

어머니의 눈을 가득 채웠던 공포를 다시 떠올리고,

그때의 일로 인해 어머니의 죽음이 앞당겨지지나 않았을까,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용서하셨을까 생각하니,

깊은 슬픔이 얼음으로 만든 창처럼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 2권 P.87

 

"내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날은." 그녀가 내 뒤에서 말문을 열었다.

"정말 화창했어요.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었고요."

그때 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롤리에서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소피를 만난 후로 이 생각을 한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부조리의 의미와 그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공포를 절감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2권 P.390

 

나는 고통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경멸해요. 이 전쟁에서는 모두가 고통받고 있어요.

유대인, 폴란드인, 집시, 러시아인, 체코인, 유고슬라비아인, 그 밖의 다른 민족들까지도요.

모두가 희생자예요. 물론 유대인들이 희생자 중의 희생자고요.

그게 다른 민족과 다른 점이죠. 하지만 어떤 고통도 소중하진 않아요.

모두들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을 뿐이에요.

- 2권 P.406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심지어 끔찍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아이가 살아 있지만 절대로 다시 보지는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게 나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에바 대신에 얀을……

얀이 왼쪽으로 가게 선택했더라면. 그러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버지니아의 어두운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리석고 저주받은,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로부터

엄청난 시간과 공간을 건너뛴 곳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 2권 P.441

 

언젠가 아우슈비츠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용감하지만 터무니없는 문장이었다.

어느 누구도 아우슈비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썼어야 옳았다.

언젠가 소피의 삶과 죽음에 대해 글을 쓸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 악이 결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제까지 아우슈비츠에 대해 나온 설명 중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은

단정 짓는 문장이 아니라 되물음이었다.

질문: "아우슈비츠에서, 신은 어디 있었는가?"

대답: "인간은 어디에 있었는가?"

- 2권 P.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