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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이방인 - 알베르 카뮈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하도 신속하고 확실하고 또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므로

나의 기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을 어귀에서 담당 간호원이 나에게 말을 한 것이다.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야릇한, 매끄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천천히 가면 더위를 먹을 우려가 있어요.

하지만 너무 빨리 가면 땀이 나서 성당 안에 들어가면 으슬으슬 춥답니다."

그 말이 옳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밖에 그날의 몇 가지 광경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령 마을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들을 따라잡았을 때 페레의 그 얼굴.

신경질과 힘겨움의 굵은 눈물 방울이 그의 뺨 위에 번득이고 있었다.

그러나 주름살 때문에 더 이상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눈물 방울은 그 일그러진 얼굴 위에 퍼졌다가 한데 모였다가 하며 니스칠을 해놓은 듯 번들거렸다.

그리고 또 성당, 보도 위에 서 있던 마을 사람들, 묘지 무덤들 위의 제라늄 꽃들,

페레의 기절(마치 무슨 꼭두각시가 해체되어 쓰러지듯 했었다), 엄마의 관 위로 굴러 떨어지던 핏빛 같은 흙,

그 속에 섞이던 나무 뿌리의 허연 살, 또 사람들, 목소리, 어느 카페 앞에서 기다리던 일,

끊임없이 도는 엔진 소리, 그리고 마침내 버스가 알제의 빛의 둥지 속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리하여 이제는 드러누워 12시간 동안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의 나의 기쁨, 그러한 것들이다.

- P.36~37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이 내 뒤에서 죄어들고 있었다.

나는 샘으로 향하여 몇 걸음 나섰다. 아랍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덮인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 사람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고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번쩍거리는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리어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뜨거운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비오듯 쏟아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하여 손으로 피스톨을 힘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나는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를 만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도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져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그 굳어진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 P.87~88

 

감옥에 있으면 시간 관념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나도 분명히 읽은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러한 것이 별로 나에게는 의미를 갖지 못했었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고 동시에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지내기는 물론 길지만 하도 길게 늘어져서 하루는 다른 하루로 넘쳐서 경계가 없어지고 나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는 거기서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제 혹은 내일이라는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P.110

 

내 앞에 나란히 열을 지은 얼굴들이 눈에 뜨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배심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얼굴들을 구별짓고 있던 특징을 나는 말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나는 전차 좌석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이름모를 승객들이 모두 웃음거리를 찾아보려고 새로 오르는 승객을 훑어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 배심원이 찾고 있던 것은 웃음거리가 아니라 죄였으니까.

그러나 그 차이는 그리 큰 것이 아니고, 어쨌든 나의 머리를 스친 것은 그러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 P.114

 

자리에 나와 서며, 문지기는 나를 바라보고 눈길을 돌렸다. 그는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잠을 자고 밀크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말했다.

그때 나는 무엇인가 방청석 전체를 격앙시키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P.121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데서 얻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검사의 변론이 곧 나에게는 따분하게 느껴졌다.

나의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킨 것은 다만 단편적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변설,

그러한 것들이었다.

- P.132

 

나는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죄인이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그 이상 더 나에게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 P.154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언제나 또 옳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너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숙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더불어 너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너 역시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네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다.

자동인형 같은 그 작은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나 마찬가지로,

또 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하던 마리나 마찬가지로 죄인인 것이다.

셀레스트는 레몽보다 낫지만, 셀레스트나 마찬가지로 레몽도 나의 친구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마리가 오늘 또 다른 사람의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바치고 있은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이 사형수야, 도대체 알기나 하느냐?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 P.157~158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기 때문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왔다.

밤 냄새, 흙 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주었다.

잠든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왜 인샌이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생애를 다시 시작해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들인 휴식시간 같았었다.

그처럼 죽음 가까이에서 어머니는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닮아 마침내는 형제 같음을 느끼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 P.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