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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책 속 글

바람이 분다, 가라 - 한강

 

 

어떤 여행지보다 하루하루의 삶이 더 낯설고 위태해지는 나이를, 그런 해들을 통과하고 있다.

 - P.23

 

모든 도시들, 국경선과 흙과 바다, 숲과 골목과 시궁창, 무덤과 개들, 나무들, 연인들, 감옥, 전쟁터, 교실과 극장,

장례행렬, 덜컹거리는 지하철, 고함치는 노천 시장 들은 450킬로미터의 대기권 안쪽에 있다.

더러 융기하고 더러 가라앉은 지각 위에. 넓거나 좁은 무수한 도로들 틈에.

450킬로미터의 납작한 두께 안에 삶이 펼쳐져 있다.

납작함 속에서 치열하게, 납작함 속에서 안이하게, 납작함 속에서 웃고 말하고 병들고 춤춘다.

납작한 세계의 안쪽을 땀 흘리며 껴안는다.

죽음의 순간까지, 아니, 죽음 뒤에도 육체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다만 시선과 생각들, 의식들만이 이상한 생명처럼, 혼령처럼 성운 사이의 텅 빈 어둠 속을 헤엄쳐 다닌다.

- P.38~39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 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P.52~53

 

삶이 제공하는 당근과 채찍에 철저히 회유되고 협박당한 사람의 얼굴로 어머니는 작은 방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살비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녀에게 삶이 폭력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떤 희망에 그토록 교묘하게 회유당했을까.

가정의 평화. 아들들의 출세. 딸의 행복한 결혼. 오순도순한 노부부의 말년.

종내에는 무릎을 무너뜨려 계단조차 오르내릴 수 없게 만든 삶을 그녀는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 P.55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 P.219

 

생명이 꺼지면 영혼은 고통 없는 곳으로 간다는 말을 당신은 믿습니까.

그 믿음에 의지해 때로 사람들은 피 흘리는 동료, 신음하는 개를 앞당겨 죽입니다.

하지만 사실일까요.

전장에서, 동물병원에서 그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할 때,

정말 사라지는 것은 그들을 지켜보던 우리의 고통 아닐까요.

- P.259

 

이제 나는 어리석은 산책길로 들어서려고 합니다. 오해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그녀 때문도, 당신의 친구 때문도, 그렇다고 당신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오랫동안 지쳐왔을 뿐입니다.

이제 나는 늙었지만, 어떤 위엄도 깨달음도 마침내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만나온 사람들과 주어진 시간을 서서히 파괴해왔고, 자신 역시 무사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교훈도 치유도 돌이킴도 없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흔들리며 끔찍하게 어두운 길을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과도, 어떤 전생의 기억과도 마주치지 않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영혼과 천사들을 위해, 내가 그르친 모든 것을 위해, 당신을 위해, 아멘.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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